



서기 1120년, 봄을 그리는 시절.
북부 로마노스 왕궁이었다.
이 시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친애하는 나의 아우인 2왕자가 사라졌소. 지금 세르메네스에 있다고 하더군."
아마도 세르메네스 측의 납치인 것으로 추정되오. 그 말은 선고와도 같았다. 왕국의 두 후계자 중 하나가 납치되었다는 벽력같은 소식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후계자의 입으로 들으니 소식이 퍽 건조했다. 섭정공의 목소리에서 차라리 웃음기라도 느꼈다면 안심이 되었을 것이나, 이 노련한 남자는 좌중에 쉽사리 평화를 주지 않았다.
북부의 왕궁에는 정적만이 깔렸다. 남부의 재빠른 이들은 목소리를 높였고 서부의 신실한 이들은 눈동자를 굴렸다. 십자가에 묶인 신의 아들이 왕좌 옆에 죽 늘어선 다양한 사람들을 투명한 나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왕의 친척, 영주, 기사, 학자, 관리, 왜 여기 불려왔는지 모를 사람들. 신의 아들은 서로를 평등하게 사랑하라고 말했으나 결국 우리 인간들은 성 앞에 한두 글자 붙는 계급이라는 것이 주는 안정감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납치가 확실합니까?"
"대공, 그대는 혼자서 거진 천 마일을 말을 타고 갈 수 있겠소?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탈주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느냐는 말입니다. 얼마 전 그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는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복도에 사열한 영주들의 머릿속에 두 개의 이미지를 심어두었다.
하나는 날이 무딘 칼로 결투를 벌이던 왕자와 섭정공의 모습이다. 형제끼리 으레 벌이는 사소한 결투였다. 섭정공은 먼저 왕자의 옆구리를 찌른다. 피는 나지 않는다. 제대로 위신이 떨어진 2왕자가 씨근대며 비껴올린 칼에 섭정공이 손등을 베인다. 별 것 아니다. 그러나 왕자가 칼을 급소에 휘둘렀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3년 전부터 세르메네스와의 개방과 외교 개혁을 판돈으로 올려둔 왕의 첫째 아들 섭정공과 왕의 적자 2왕자의 체스에서 2왕자가 반칙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북부는 거짓말쟁이를 섬기지 않는다. 2왕자의 정치적 위신은 땅에 짓밟혔다. 이 때 납치되었다면 2왕자로서는 천운이고, 도망쳤대도 별로 말이 안 될 것은 없다는 소리다.
"속단하셔서는 안 됩니다, 공(公)."
― 비록 남부의 사람들은 뱀 같은 섭정공이 왕자의 칼날을 날이 선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분명 자신의 목숨까지 체스판에 올려두고도 남을 남자야.
"대공, 그대가 왕자와 정치적 뜻을 같이 하는 것은 알고 있네. 물론 세르메네스를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겠지. 하지만 나는 황제국이 우리와는 배척되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누누히 말해왔소. 지도를 보면 분명한 정황이 있지 않소?"
둘째는 빈 왕좌다. 400년 만에 북부 왕조의 후계가 끊길 수도 있다. 섭정공은 유능한 사람이지만, 그 뿐이다. 비록 그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자와 기싸움을 오래간 벌여왔다는 것을 연합 왕국 안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피가 섞인 혈육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그 말은, 왕자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한다면 누구든 왕좌에 도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이미 북부의 왕좌 또한 성씨 다른 주인을 두 번 거친 것이다. 이셀로네아의 왕관에는 동족의 피가 묻어있고 우리의 역사서는 동족의 눈물로 쓰여졌다.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서부의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이 예쁘장한 홍안의 젊은이는 섭정공의 나이의 반밖에 안 되었지만 섭정공의 두 배 이상 보수적이라는 것은 거렁뱅이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전쟁을 원한다는 것도. 뒷쪽에 가만히 서 있던 가면 쓴 기사단장이 자세를 바로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공. 왕자를 돌려받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제대로 수 없습니다. 왕자가 세르메네스에 우호적인 개혁세력으로 유명했으니 그의 신성한 핏줄으로 말미암아 외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것이겠지요. 그 나라에서 그렇게 나온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서-남 내전에 세르메네스가 개입한 바를 잊지 않았습니다."
바다의 딸, 칼리아라 대공이 헛기침을 했다. 분명한 모독이었다. 북부인들이었다면 당장에 칼을 뽑았을 그것도 아주 지독한 모독이었으나 대공은 독을 바른 비수를 혀 아래 숨길 줄 알았다. 남부인들은 으레 그랬다.
"이제 결정을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씀입니다."
"결정은 이미 내려졌소. 세르메네스로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외교 협상을 제안할 거요. 왕자를 돌려보내고 납치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지불한다면, ... ..."
섭정공은 더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웃을 뿐이다.
누구도 섭정공이 그리 말할 때에 뒷말을 감히 물을 수 없었다.
금일 회의의 마지막 말로 말미암아 왕궁에는 다시 정적만이 감돌았다. 사절이 돌아오기 전까지... ...
우리는 예정된 사냥 대회를 즐길 것이오. 이제 봄을 그리는 꿈을 꿀 때가 되지 않았소.
서기 1120년, 눈이 녹기를 바라는 시절.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살얼음이었다.
이 시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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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2왕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왕의 둘째 적자이자 후계로 거론되는 유일한 적자인 베로네세는 왕의 공식적인 첫째이지만 왕과 왕비 둘 중 누구의 피도 섞이지 않은 수양아들인 로드릭과 왕세자의 자리를 두고 3년 간 치열한 정치싸움을 벌여왔습니다. 그것은 베로네세가 세르메네스와의 교섭을 지지하는 신진세력인 반면 로드릭이 교섭을 반대하고 내치를 강조하는 구세력이어서이기도 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섭정공과 서부의 수장 하셴 대주교가 구세력을, 2왕자와 그의 약혼녀(를 대리하는 기사단장) 그리고 남부의 수장 칼리아라 대공이 신진세력을 대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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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 더 탄탄한 로드릭과 탁월한 정통성을 가진 베로네세의 경쟁은 베로네세가 로드릭을 결투 중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 혹은 누명이 드러나면서 무너지게 됩니다. 북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결투에 권모술수를 끌어들였다는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지게 된 2왕자 베로네세는 얼마간 가타부타 말이 없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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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의 수하에 따르면 그는 현재 세르메네스 황제의 수중에 있다고 합니다. 섭정공 로드릭은 세르메네스가 그를 납치했다면서 세르메네스에게 그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베로네세가 도망쳐 황제에게 몸을 의탁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지금 왕좌가 비었고, 왕의 수양아들로서 정통성이 미약한 로드릭의 약점은 2왕자가 사라지면서 더욱 두드러졌고, 서부와 남부의 영주들이 왕좌를 암암리에 눈독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까딱 조심하지 않으면 과거의 아픈 역사인 내전이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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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 저러나, 일단 우리는 사냥대회를 준비합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서나요?
― 중립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인생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랍니다.
§. 신진세력
주로 남부인들과 북부인 일부가 많이 지지하는 세력이다. 신진세력은 세르메네스와 적극적으로 수교하여 그들의 지식과 문물, 문화를 받아들이고 우호적인 외교 관계로 전환하여 상호 간에 신뢰를 구축하고 상업적 교류를 넘어 통상의 저변을 확대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2왕자와 남부 대공이 신진 세력의 대표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남부인인 신진 세력은 남부 해적의 세르메네스 약탈에 '세금을 걷을 명분이 추가적으로 생겨난다는' 이권이 엮여 있기 때문에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 구세력
주로 서부인들과 북부인 다수가 많이 지지하는 세력이다. 구세력은 완전히 문화가 다르며 강대한 영토와 군사력을 가진 세르메네스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국내 정치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국가의 주권을 흡수당할 수 있으므로 위험하고, 다신교를 믿는 그들은 본질적으로 이단이므로 상업적 교류 이외의 문화적/정치적 교류는 금해야 하며 세르메네스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북부 섭정공과 서부 대주교가 구세력의 대표적 지도자였다.

